해인사 대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
해인사 대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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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8.1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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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걸었던 이 땅의 사람들

그 숱한 노고의 결집으로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늘도 건재하다


합천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목, 홍류동을 지난다.

계류는 힘차고 산기슭에는 소나무가 바위와 어울려 있다. 적송(赤松)인 소나무는 노송인데 세월에 걸맞은 품격이 넘쳐흐른다. 안면도의 솔숲처럼 넓은 솔밭은 아니어서 홍류동의 소나무는 듬성듬성한 맛이 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더 (진정으로 강한 자는 무리 지어 살지 않는다던가?) 소나무의 자태는 의젓하고 품위가 있다. 소나무 몇 그루만 보고 있어도 왜 이곳으로 신라 시절 최치원이 찾아들었는지, 왜 이곳을 고래로 이 땅의 십승지(十勝地)로 불렀는지 알 만하다.

솔밭을 지나면 해인사가 있다. 절의 맨 뒤에는 대장경판전이 자리한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곳.

대장경판전은 해인사 마당에서 볼 때 바깥쪽에 해당하는 앞 건물이 수다라장(修多羅藏)이고, 뒷건물이 법보전(法寶殿)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에는 두 채의 경판장이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전 4동으로 국보 제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경판전 안에는 국보 32호인 고려대장경판 81,258매, 국보 제 206호인 고려각판 2275매가 보존돼 있다. 이것은 199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건 고려 무신정권 때이다. 당시 권력자인 최우가 초조 대장경이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

경판의 총 판수가 81,240매에 달한다. 84,000 가지의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고 초조대장경이 전란 속에서 타버리고 그것을 다시 판각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대장경판전 뜰 가운데서 판전들을 둘러본다. 대장경판전이 대장경을 보존하기 위해 갖고 있는 과학적인 통풍체계, 대장경 자체의 방대함,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정한 대장경 내용의 정확함 등등이 기억에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이곳 뜰에 선 것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검증된 사실들을 확인하고 싶어서는 아니다. 근래의 한 인물, 김영환 공군 대령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다.

대장경판전과 대장경은 여러 번 소실 위기를 맞는다. 그 때마다 대장경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의 신념과 의지와 피땀에 의해서 대장경은 위기를 넘긴다. 그런 위기 가운데서도 1951년 9월 18일의 사건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당시, 미군사고문단은 합천 가야산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 공군에게 폭격기 편대를 출격을 요구한다. 출격한 편대의 편대장은 김영환 대령. 장착한 폭탄은 750 파운드의 네이팜탄. 훗날 월남전에서도 사용된 것으로서 투하 지역을 모두 불바다로 만드는 폭탄이다. 네이팜탄이 투하되면 대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은 물론이고 해인사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게 되는 상황이다.

김영환 대령은 가야산 해인사 상공에 이르러 편대기들에게 폭격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편대장의 지시 없이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고 기관총 소사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빨치산의 진지를 공격하라는 것. 이는 폭탄을 투하시키라는 명령과 배치됨은 물론이다.

편대가 귀대한 후 명령대로 폭격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게 된 미군사고문단이 윌슨 장군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명령불복종을 항의한다. 이 대통령은 분노하여 김 대령을 총살도 아닌 포살(砲殺)에 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때 배석한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명령불복종 행위를 변호한다. 그는 미군사고문단의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한 김영환 대령의 형이다.

김영환 대령은 명령불복종과 관련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우리 민족에게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있습니다. 이를 어찌 유동적인 수백 명의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빨치산 몇 명을 죽이기 위해 한국의 문화재쯤은 잿더미로 만들어 버려도 괜찮다고 여긴 미군사고문단.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장교를 총 아닌 대포를 쏘아 죽여 버려야 한다고 막말을 해 댄 이 나라의 대통령.

문화유산에 무지하고 그저 외국 군대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그 대통령이 이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한다. 미국에서 살았던 것을 내세우고 싶어서인지 말을 할 때면 벌벌 떨리는, 영어 비슷한 소리를 냈던 노회한 정치꾼에게 나는 거듭 절망한다. 문화재를 지키려고 목숨을 건 김영환 대령과 비교하노라면 그 절망은 더욱 더 깊어진다.

대장경판전 앞에는 팔월의 뙤약볕이 작열한다. 나는 지붕 너머로 가야산에 서 있는 소나무를 찾는다. 가야산의 소나무들은 의젓하다. 그 소나무에서 김영환 대령의 모습을 찾아낸다. 비로소 마음이 시원해진다.

대장경판전으로 들어가 문살 틈으로 대장경 경판을 들여다본다. 큰 깨달음[頓悟]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위해 늘 몸과 마음을 닦는[漸修]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는 이 나라 불교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문화유산을 만들어내는 것도 값지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것도 또한 값지다는 사실을 안다.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의 그 숱한 노고가 바로 장엄한 화엄(華嚴)의 바다를 이루는 물방울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장경판장 지붕 너머로 가야산이 보인다. 한 그루, 한 그루 소나무가 이루어내는 녹음은 팔월의 뙤약볕에도 청정하다.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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