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반야봉
지리산 반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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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8.25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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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봉이 아니면서도 지리산을 대표하는 봉우리
주능선에서 약간 비켜나 있어서 여유가 있는 곳

지리산 종주에 나선 사람들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약 26킬로미터를 걷는다. 그들은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거쳐 노루목에 이른다.

(노루목은 경사가 심해서 노루가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곳을 말하는데 전국 산에서 흔히 만나는 지명이다. 보통명사인 것이다.) 노루목에서 반야봉 정상까지는 1킬로미터이다. 30여 분이면 오른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걸어가는 데는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리므로 30여 분은 많은 게 아니다. 그런데도 대개는 반야봉을 오르지 않는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 바빠서란다.

그들은 천왕봉에 가서 일출을 보려고 그렇게 서둔다고 한다. 일출을 꼭 천왕봉에서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지리산에 온 이유가 장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최고봉이니 뭐니 하고 따지는 것이 인간의 하찮은 오만임을 모른단 말인가?

젊어서는 산을 보면 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한다. 객기 혹은 치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나이가 들면 산기슭에서 논다. 어울림이 무엇인지 알게 된 탓이다.

노년에 이르면 산을 바라만 보아도 된다. 관조의 세계이고 선(禪)의 묘미이다.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네[東籬下採菊 悠然見南山]’라고 말한 그 경지.

나는 노루목에서 반야봉으로 향한다. 천왕봉으로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려가는 것보다는, 지리산 종주라는 이름으로 그저 앞으로 가기에 급급한 무리 속에서 허덕이기보다는 잠깐 옆으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여유 아닌가 싶어서다.

멀리 벗어나면 그것은 여유라기보다는 도피이다. 반야봉은 벗어나 있되 도피는 아니다. 장대한 지리산 능선에서 1킬로미터의 거리는 ‘벗어난 듯 만 듯한’ 정도에 불과하다. 반야봉에서는 도피 아닌 여유가 느껴진다.

반야봉은 그 모습이 맘에 든다. 반야봉은 상봉과 중봉이 나란히 붙어 있다. 사람들은 멀리서 보면 반야봉이 여자 엉덩이처럼 생겼다고 한다. 매끈하지는 않고 펑퍼짐한 엉덩이 꼴이다.

날씬한 봉우리 둘이 이렇게 붙어 있다면 흔히 형제봉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그런 이름이 붙지 않은 걸 보아도 반야봉 두 봉우리가 여느 사람 눈에도 펑퍼짐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정한 반야봉의 두 봉우리. 그 아래에서는 1950년대에 빨치산과 군경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눴다. 그 싸움의 흔적은 없어졌지만 반야봉 아래 뱀사골 입구에는 군경승전비가 서서 그 당시의 싸움을 지금도 기억시키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반야봉의 두 봉우리가 너무나 다정해서 그걸 보고 있노라면 대립이라는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지리산을 자주 다니는 산악인들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로 반야봉을 든다.

높이로 따지면 천왕봉에 못 미쳐서 제2봉이지만 반야봉은 지리산 어디에서나 가장 잘 보이는데다가 그 모습이 독특해서 지리산을 잘 모르는 사람도 사진에 반야봉이 나와 있으면 ‘지리산이다’, 라고 소리치게 된다는 것이다.

최고봉이 아니면서도 전체를 대표하는 봉우리. 이것이 또한 반야봉의 멋이다.

우리는 어떤 조직에서 맨 위에 있어야만 그 조직을 대표한다고 여긴다. 이런 사고는 상당부분 군사문화적인 발상이다. 반야봉은 이런 발상을 깨 준다. 그래서 지리산은 어리석은 이들을 현명하게 만드는 산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일까?

반야봉이 아름다운 또 하나의 이유는 구상나무 때문이다. 구상나무는 지리산 여러 곳에 군락이 있으며 반야봉도 그 중 하나이다. 구상나무를 보노라면 상록수 중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가 있을까 싶다.

구상나무는 전나무, 비자나무와 이파리가 비슷하게 생겼으나 조금 작다. 새로 나온 이파리는 서리가 내려앉은 듯이 하얀 기운이 감돈다. 지리산에 흔한 흰구름의 여운이 남아 감도는 듯도 하다.

구상나무는 세계적인 정원수가 된 지 오래이다. 우리가 남의 나라 화초에 넋이 빠져있는 동안 그들은 우리의 구상나무를 가져가서 어떻게 팔아먹었는지 여기서 새삼스레 말하고 싶지는 않다. 과거가 어떻든 구상나무는 여전히 아름답다.

반야봉의 두 봉우리 중 하나인 상봉에 선다. 중봉은 자연휴식년제 실시에 의해 출입이 금지돼 있어서 반야봉 상봉만이 탐방할 수 있다.

꼭대기는 유명한 산의 꼭대기가 그러하듯이 극히 평범하다. 산에 오를 때면 늘 배우는 사실이기도 하다. 꼭대기는 저 아래의 골짜기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것.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것. 반야(般若)는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이요[喫茶去]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

반야봉에서 나는 오래 머무른다.



정법종 기자 power@epowe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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